글= 윤기환 그림= 김용현
불암산 둘레 길을 걷다가 점심때를 놓치고 말았다.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망설이며 걷는데, 손칼국수 집이 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선뜻 식당에 들어섰다. 배고픈 김에 곱빼기를 시켰다. 함지박만 한 큰 그릇에 담긴 푸짐한 칼국수 한 그릇이 내 식탁에 배달되었다. 고추장을 듬뿍 풀어 걸쭉해진 칼국수 한 젓가락 크게 떴다. 칼국수의 아득한 기억이 입안으로 퍼진다.
어릴 적 여름 나절이면, 아버지는 칼국수를 자주 만들어주셨다. 우리 삼 형제는 아버지 옆에 쪼그려 앉아, 밀가루가 반죽이 되고, 반죽이 밀대를 만나 둥근 보름달이 되고, 도마 위에서 가지런히 썰어져 토실토실한 국수 가락으로 변하는 것을 신기한 요술 보듯 구경했다. 소쿠리에 가득 담긴 칼국수가 부엌으로 보내지면, 끓이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풋고추와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칼국수가 가마솥에서 풀풀 김을 내며 끓어오를 때면, 우리는 쪼르르 아궁이 앞에 앉아 칼국수가 빨리 익기를 기다렸다.
커다란 양푼에 담긴 칼국수가 마루로 옮겨지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가 식구마다 한 그릇씩 담길 때면, 배가 고팠던 우리 삼 형제는 조금이라도 더 큰 그릇을 차지하려고 눈치 보기 바빴다. 그 시절 보릿고개를 넘을 때면, 가끔씩 주린 배를 배불리 채워준 것이 아버지의 손칼국수였다.
아버지는 칼국수에 고추장을 듬뿍 풀어 드셨다. 어린 나도 아버지를 따라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것이 좋았다. 고추장이 주는 맵고 걸쭉한 맛이 어쩐지 어린 나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지금도 칼국수에 고추장을 듬뿍 풀어 먹는 나의 남다른 식습관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닮은 입맛에서 시작되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도, 아버지는 우리 삼 형제에게 가끔씩 손칼국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손칼국수는 가게에서 파는 국수나 라면으로 대체되었다. 아버지의 칼국수도 세월 속에 묻혀 잊혀져 갔다.
내가 결혼과 함께 부모님과 산지도 어언 30여 년이 흘렀다.
3년 전쯤이던가? 식구들과 함께 점심으로 국수를 끓여 먹다가, 문득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손칼국수가 생각났다. 나는 그 맛이 그리워, 아버지가 만드신 칼국수를 꼭 한번 먹고 싶다고 했다.
“그때만큼 맛이 있겄냐? 그래도 니가 먹고 싶다니 한 번 만들어 먹어보자!”라며
아버지는 웃음으로 약속하셨다. 그렇게 찰떡같이 약속했던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 가시더니, 아들한테 칼국수 한 그릇 해주기 싫으신지 영 안 오신다. 아들은 오늘도 아버지의 칼국수가 그리운데....
잘 익은 열무김치가 손칼국수 맛을 더해준다.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칼국수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리움 한 그릇을 국물까지 다 비웠다.
이제 기다림은 허무하다. 오지 않을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이번 주말에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그리움 한 그릇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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