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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풍경
등록날짜 [ 2024년06월07일 11시03분 ]


아침이 창을 연다. 불암산 자락이 붉게 물들며 서서히 세상을 깨우고 있다. 아내의 손길이 바쁘다. 압력밥솥이 씩씩거리며 돌아가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거실에 가득하다. 거실 TV는 새롭지 않은 소식들을 시끄럽게 알리고 있다. 

아버지는 벌써 거실 소파에 나와 계시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의 도움을 받고 있으나 볼륨은 날로 커져만 간다. 열린 안방 문틈으로 또 다른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신 어머니는 기독교 방송에 눈을 맞추고 계신다. 거실과 안방에서 소음 같이 쏟아지는 TV 소리에 온 식구가 익숙해진 지 오래다.

아들·딸을 깨워 여섯 식구가 식탁에 앉았다. 아들이 후다닥 밥그릇을 비우고 제일 먼저 자리를 뜬다. 딸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일어선다. 묵묵히 식사하시는 어머니 아버지께 몇 마디 말을 붙여 보지만 짧은 답이 돌아올 뿐 반응이 별로 없다. 나이를 드시면서 두 분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더니 식탁에서 조차도 대화가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 차례로 자리를 뜬다. 아버지는 다시 소파에 몸을 누이며 TV를 켜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신다. 늘 그랬듯이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 시작된다. 햇살이 창문을 두드린다.

장남인 내가 결혼하면서, 부모님과 살기 위해 처음으로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작은 평수의 연립주택이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TV를 보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거실에는 종일 깔깔거리는 소리가 흐르고, 손자의 재롱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름을 잊었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 살림하고, 날아갈까 꺼질까 물고 빨며 종일 손주를 끌어안고 살았다.
몇 해가 지나, 좀 더 넓은 거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기다리던 둘째 손녀도 태어났다. 거실은 또다시 아이의 웃음소리로 채워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이따금씩 아들 셋과 며느리들, 손자 손녀까지 열네 명의 피붙이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면 거실은 밤늦도록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닐 때면 당신들이 이룬 작은 왕국을 무척이나 흐뭇해하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기도로 사셨다. 그 힘든 세월을 신앙으로 버텨 오신 어머니는 하루도 기도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 손주들 목욕시킬 때에도,식사할 때도, 잠들기 전에도,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셨다. 지금도 그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그 눈물의 기도를 먹고 우리 삼형제가 커왔고, 그 사랑을 먹고 손주들이 구김 없이 자란 곳도 바로 거실이었다.

올해로 여든여덟의 아버지와 여든넷의 어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함께 살아온 지도 30여 년이다. 그동안 거실을 다섯 번 옮겼다. 그때마다 거실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언제나 거실의 주인이셨던 두 분이 차츰 세상사 관심거리를 하나둘 놓으시더니 웃음마저 잃어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기억력이 쇠잔한 어머니가 거실에서 사라진 사건이 있었고, 아버지가 크게 넘어져서 응급실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돌아오셨지만, 불쑥 이 거실에서 두 분을 영영 뵐 수 없는 날이 올 것 같아 문득문득 두려워진다. 오늘 아침이 그랬듯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아침을 맞는 일이 그저 다행이고 행복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 삶의 조물주이자 시작점이신 부모님이 마지막 자락쯤에 외롭게 앉아 계신다. 열네 식구의 웃어른으로 일가를 이루며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 그 지난 했던 삶의 뒤안길에서 마른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잎새처럼,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질 것 같은 모습으로 썰렁한 거실을 지키고 계신다.
머지않아 이 거실에는 우리 아이들이 낳은 손주들의 웃음소리가 넘치고, 내 부모가 그랬듯이, 나 또한 그들을 보며 웃고 울고 할 것이다. 그렇게 세대가 바뀌고 거실 풍경도 바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거실은 당신들이 주고 간 사랑과 함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공간일 것을 믿는다.
거실에 앉아 계신 두 분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아련하고 쓸쓸하다.

글= 윤기환   그림= 김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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